[터키 이즈미르 교환학생]_#15 모스크바, 대조국전쟁 박물관(Victory museum)
러시아 사람들은 제 2차 세계대전을 대조국전쟁이라고 부른다
▲버스에서 내려 대조국전쟁 박물관에 가는 길
2차세계대전, 그 중에서도 독일과 소련이 전투를 벌인 동부전선을 러시아에서는 대조국전쟁이라고 부릅니다. 이는 2차세계대전에서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내며 소련 본토를 지켜했고, 그 결과를 통해 통해 미국과 국제체제를 주도하며 세계질서를 주도할 수 있었던 자부심에서 오는 표현으로 보입니다. 굳이 러시아인의 자부심이 아니더라도 이 시기의 소련의 승리가 큰 역할을 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외관부터 큰 규모의 기념관과 높은 기념탑 때문에 놀랐던 박물관
박물관은 도시 외곽에 있었는데, 정식 영어 명칭은 Victory museum으로, Victory Monument도 같이
있었습니다. 이 전승탑에는 그때의 전쟁상들이 부조로 구현되어 있습니다.
박물관의 규모도 크고, 박물관 전경은 공원처럼 구성되어 있어 가족단위의 방문객들이 이리저리
둘러보는 것들을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대조국전쟁 박물관 전경
▲박물관 전경, 그리고 그 앞에 있는 기념비
지하부터 시작되는 전시는 당시 소련군의 참상을 보여주며 시작합니다. 문제는 지하 1층에 있는 대다수의 자료들이 러시아어로 작성되어 있었습니다. 심지어 아래 사진의 동상도 그 명칭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박물관 지하 1층 입구에서 찍은 사진
▲군인과 그를 껴안는 여인을 묘사한 상
러시아어를 몰라 그냥 제가 알아보았습니다
2차세계대전의 많은 전투 중 독소전쟁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러시아인들이 이렇게까지 기념하는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전간기(1차세계대전 이후부터 2차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의 기간으로 1918년~1939년)의 국제관계부터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때에는 아직 미국이 절대적인 역량을 발휘하는 때가 아닌 상황에서 승전국들의 입장이 달랐던 시기입니다. 동시에 소련의 전략적 선택이 중요한 기점으로 작용했던 시기입니다.
▲지하 1층 전시관 관람을 마치고 1층 본관으로 올라가는 길에서 찍은 사진
전간기 국제질서에 대한 이해
1차, 2차세계대전에서 독일의 최대 목표는 동서 양쪽에서 동시에 전투가 벌어지는 상황을 만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동시에 열강의 주요한 고민 중 하나는 동서에서 독일을 고립시키기 위해 동쪽에서 러시아를 활용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각 국가마다 이해관계가 너무 달랐습니다.
독일에게 가장 많이 피해를 받았던 것은 프랑스였습니다. 1차 세계대전 때 참호전도 주로 프랑스 영토 내에서 이루어졌으며 보불전쟁 (1870-1871년)때 파리가 점령된 적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프랑스는 전후 독일을 압박하는데 가장 적극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단독으로 독일을 견제하는 것에는 부담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영국은 프랑스만큼 직접적인 동기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독일을 경제적 파트너로 삼아 경제적인 이권을 도모하고자 했고, 독일을 누르며 프랑스가 과도하게 성장하는 것도 달갑지 않았습니다. 영국 특유의 ‘영예로운 고립’을 통한 유럽 내 세력균형을 고려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탈리아는 영국과 프랑스의 협력과 도움이 필요했을 뿐, 진짜 목표는 독일의 성장을 경계하는 것보다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하는 것에 있었습니다. 게다가 이탈리아는 외교정책의 바꾸기 시작합니다. 1934년 독일의 오스트리아 병합을 반대했던 이탈리아가 1935년 독일이 재군비 선언을 열강이 묵인하자 역시 자신들의 침공도 묵인할 것으로 예상하며 에티오피아를 1935년에 침략했으나, 이를 규탄한 영국, 프랑스와의 단절을 극복하기 위해 독일과 외교관계를 형성하여 훗날 추축국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독일이 가장 두려워한 양면 공격, 그 한 축이 바로 러시아이지만
이렇게 각자의 계산대로 유럽이 복잡하게 돌아갈 때, 소련은 역시 독일의 성장에 위협을 느껴 외교적 고립을 극복하기 위해 열강과 적극적으로 협력을 꾀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을 믿지 못한 영국, 프랑스는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동유럽 국가들, 특히 폴란드는 소련과 협력하는 것을 극렬하게 반대하였습니다. 적백내전기 때 오히려 백군을 도와 소련을 공격한 서방 국가들과 관계를 개선한다는 것도 소련에게는 그다지 달가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독일을 어쨌든 막아야만 했습니다. 문제는 모두가 자신이 독일과 싸우는 그 첫 번째가 되기는 싫었던 것입니다. 이 상황에서 소련은 발상의 전환을 하게 됩니다. 소련이 직접 그 독일과 직접 불가침 조약을 맺는 것입니다.
언젠가부터 소련은 믿을 만한 서방국가도 딱히 없고, 적대적인 동유럽 국가와 집단 안보를 구성하는 것보다 신흥 강국 독일과 세력균형을 미리 조율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습니다. 독일의 입장에서도 동부전선의 안정은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결국 두 나라는 1939년 8월 23일 독소불가침 조약을 맺고, 뒤이어 독일은 1939년 9월 1일 폴란드 침공을 시작으로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고 영국을 제외한 유럽 대륙 전역을 제패하게 됩니다.
사실 무모한 작전은 아니었던 독일의 소련 침공
하지만 나치 독일과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은 근본적으로 한편이 될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국을 유럽 대륙을 장악한 독일은 소련으로 눈을 돌리게 됩니다. 지금의 시선으로는 히틀러의 오만으로 보이겠지만, 당시에는 프랑스, 폴란드를 전격적으로 패배시킨 독일 육군이 다시 한번 진가를 발휘한다면 소련을 제압하고 유리하게 전쟁을 주도할 수 있다는 판단이 있었습니다.
독소전쟁이 대조국 전쟁이라고 불리는 이유
결국 독일이 6월 22일 소련을 침공하여 독소전쟁이 시작됩니다. 초기에 독일군은 승리를 거듭하며 모스크바를 향해 진군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은 서부의 공업도시의 설비를 동쪽으로 옮겨 끊임없이 물자와 병력을 동원했습니다. 그만큼 처절했습니다. 각자의 교전국들을 모두 합쳐 소련군 총 3450만명, 독일군 총 1800만 명이 참전하고 소련 민간인 피해 2000만명을 남긴 것이 바로 독소전쟁이며, 이 독소전쟁을 다룬 곳이 이곳 대조국전쟁 박물관입니다. 러시아의 입장에서는 숭고하게 여기고 기념할 수 밖에 없는 곳입니다.
가운데 홀에서 이렇게 영상을 상영하기도 합니다.
엄청난 피해에도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연합국에 참전한 미국이 가세하여 소련이 물자를 지원하면서 소련은 지속적으로 물자를 조급할 수 있었으며 마침내 독일에게 승리하여, 2차세계대전에 주요한 승전국으로 거듭나게 되고 소련은 초강대국이 됩니다. 소련의 입장에서는 정말 총력전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전쟁이기 때문에 전시관은 전쟁의 참혹한 순간들을 조명하고, 또한 그 때의 참전 용사를 기념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실제 참혹한 전쟁을 재현한 공간
저는 박물관에 가거나 유적지를 갈 때, 굳이 하나하나 다 설명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찾아보면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신 배경이나 맥락을 조금 자세히 찾아보고 이를 기반으로 스스로 둘러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나중에라도 무언가 계기나 동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도 굳이 레닌그라드,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같은 주요 경과를 자세히 적지 않는 이유도 그것 때문입니다. 대신, 당시 포격으로 초토화된 소련 영토를 입체적으로 구현해 둔 전시장소가 있어 이부분만 몇개 소개해볼까 합니다.
▲관람을 마치고 걷다가 발견한 조형물
대조국전쟁과 조국전쟁
대조국전쟁말고도 조국전쟁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앞에 다루었던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입니다. 두 전쟁 모두 러시아가 일약 강대국으로 도약할 수 있는 계기였고, 러시아 특유의 지연전과 물량전, 그리고 겨울과 함께 독일과 프랑스라는 강대국과 싸워 이긴 전쟁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런만큼 이 두 박물관은 볼거리가 많은 공간입니다. 잘 몰라도 하나하나 살펴보면 볼 것도 많고 신기한 전기 기법들도 살펴볼 수 있기 때문에 따로따로 한 번 다루어보았습니다.
다음에는 몇가지 박물관 들을 합쳐서 써보고, 러시아 일상으로 한편을 다루어보고 다시 터키의 생활과 교환학생 공부일기를 작성해보고자 합니다. 이번에는 너무 많이 길게 썼습니다. 욕심을 내다보니 줄인다고 줄였지만 그래도 너무 길어서 죄송합니다. 다음부터는 최대한 짧게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