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기 보이는 이 석상은 해발고도 220m. 부다 지 구의 도나우 강변 근처 겔레르트 언덕이 위치하고 있고
이곳에서는 페스트 지구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전망이 뛰어난 곳이랍니다.
옛날에는 케렌 언덕이라고 불렀는데, 11 세기에 이 언 덕에서 전사한 성(聖) 겔레르트를 기 리기 위해 개칭하였다고 해요..
정상에는 19 세기에 쌓은 오스트리아의 성터와 1945년 부다페스트 해방을 기념하는 해방기념상(像)이 있답니다.

사실 이 겔레르트 언덕에는 헝가리 근대사의 상처가 놓여있답니다.
지금 볼 수 있는 꼭대기의 성채는 합스부르크 제국이 1850 년부터 1854 년까지 만 든 것으로
과거에 만든 요새 개념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아 두셔야 돼요.
헝가리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식민지였으며 페스트에서 발생하고 있던 독립운동감시용 망루였다고해요.
1848년부터 2 년간 계 속된 헝가리인들의 독립전쟁, 그 이 후에도 식을 줄 모르던
헝가리인들의 독립운동에 대 한 합스부르크 제국의 감시초소...라.
다른 나라 역사를 알 수록 일본과 한국이 떠오르는 건 뭘까요. 헝가
리도 합스부르크의 식민지였지만 자기 나라를 되찾기 위한 독립 운동도 하였다니..
뭔가 그때는 설명도 듣지 않고 와 예쁘다 야경이 멋있다라고 바라봤는데, 헝가리 아픔이 녹아있는 장소였어요.

동-서 방향으로 건설된 성벽의 길이는 200m, 높이는 4~6m 그리고 벽 의 두께는 1~3m인 망루.
그러다 19 세기 말 합스부르크 제 국군대가 이곳을 떠나 철수할때성곽이 부분적으로 파괴되었다고해요.
물론 그뒤에도 다시 새로 개조하여서 헝가리군이 이어서 요새로 사용했지요.
우리나라가 일재의 잔재 건축물을다시 개조해서 사용하듯이 말이죠. .
하지만 여기서 이제 헝가리의 수모는 끝이 나느냐.. 아닙니다.
제2 차 세 계대전 기간엔 독일이 들어왔고 이 요새에 방공포대를 설치했다고 해요
그리고 요새의 다 른 쪽은 전범수용소로 이용했답니다.
그러다 1944 년 마 침내 소련군이 침공하자 나치 독일은 이 요새에서 최후의 방어전을 펼치다 마침내 무릎을 꿇었던 것이지요.

소련은 그 기 념으로 1947 년 시 타델러 꼭대기에 높이만 무려 40m 에 달 하는 소녀의 동상,
이른바 '자유의 여신상'을 세웠답니다.
이 소녀는 두 팔을 지켜든 채 승리를 뜻하는 종려나무를 펼쳐 들어 보인답니다. '소련군이 마 침내 승리했다'는 징표이지요.
나치 독일군과의 싸움에서 전사한 소련군 추모 위령탑(헝가리 유 명 조각가 Zsigmond Kisfaludi Strobel이 제 작한 여신상)이지요..
물론 소련군이 나치를 물리치긴 했지만, 이곳은 헝가리의 영토인데,
헝가리를 내포하고 있기보다는 공산주의의 향기가 스물스물 나네요.
.

그렇게 소련군이 헝가리를 점령하고 나서 그 영향력이 약해질 무렵 공산주의가 무너지자 '
자유의 여신상' 철거가 당 면 과제로 떠올랐답니다. 글쎄요.
역사의 한부분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어 영광이든 치욕이든 그것도 그
들 역사의 일부분이고 또 그기념비 보존을 통해 다시는 그런 치욕을 격지 않겠다 라는 뜻으로 남겨두었을 듯 싶습니다.
그렇기에 지금도 관광객들이 겔레르트 언덕에 있는 종려나무를 든 자유의 여신상을 마음껏 볼 수 있는 것이겠지요
참고 및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겔레르트 헤 지 (부다페스트-다뉴브의 진주, 2006. 6. 30., (주)살림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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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부분에서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에 대한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는데,
김영삼 대통령의 결정으로 이미 총독부는 파괴되었지만, 사실 나는 잘 된 일이라고 생각해요
부다페스트처럼 딱히 관광지로 될만한 요소도 없고 우리나라의 건축물을 막은 뒤 그 앞에 지어졌으니
그 건물 자체로 치욕일 수밖에. 고로 이 과거에 승리의 유물인지 치욕의 유물인지 잘 생각해보고 결정해야할 듯 합니다.

이런 치열한 역사속에서 남은 부다페스트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