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시간의 짧은 비행 후 나는 깔리보 공항에 도착했다. 깔리보 공항에는 보라카이 선착장까지 운행하는 벤을 타라는 호객꾼들로 가득했다. 깔리보 공항에서 선착장까지 가는 벤은 200페소이고 2시간가량 걸린다. 벤을 타고 가는 2시간 내내 차창 밖은 어두워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흔한 가로등조차 없는 산길을 지나가는데, 밤하늘의 별들이 쏟아질 정도로 많이 보였다. 선착장에 도착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마침 가이드라고 자신을 소개한 한 중국인 아주머니 덕분에 무사히 배를 탈 수 있었다. 이곳에서 우리는 환경세 75페소, 배 삯 50페소 그리고 터미널 요금으로 50페소를 냈다. 배로는 10분 정도 걸리는 가까운 거리였다. 어두운 저녁인데 불구하고 물이 맑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배에서 내린 후에는 선착장에서 대기하고 있는 트라이시클을 타고 리조트로 갔다.
R과 내가 묵게 될 리조트인 파라다이스 가든 리조트는 생각보다 좋았다. 다만 우리는 트리플을 예약했는데, 트리플이 아닌 더블룸을 배정 받아서 황당했다. 그 점만 제외한다면 조식이나 부대시설은 만족스러웠다. 기대감으로 뜬 눈 새운 다음날 아침, 우리는 대충 씻고서는 7시 30분 경 조식 뷔페에 갔다. 실내가 아닌 야외에서 즐기는 아침 만찬은 새로웠다. 다행히도 R은 원래의 쌩쌩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아침을 먹자마자 우리 일행은 아침바다를 보러 나갔다. 보라카이는 길이가 7km 밖에 안되는 작은 섬이다. 스테이션1,2,3으로 모두 3개의 구간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스테이션1은 고급 리조트와 조용한 비치가 있고 스테이션 2에는 쇼핑단지인 Dmall을 비롯하여 각종 레스토랑과 바, 카페가 모여 있다. 스테이션3는 저렴한 숙소와 리조트가 모여 있는 곳이다. 스테이션 3에서 스테이션 1까지는 걸어서 약 30분 정도 걸렸다. 우리는 보라카이에 있는 동안 이 거리를 10번도 넘게 왕복했다. 이곳에 오기 전 우리의 모토는 보라카이에 6년 산 사람보다 보라카이의 속속 들이에 대해 잘 알자라는 것이었다. 실제로 떠날 즘에 우리는 모든 가게, 술집이 어디 있는지 지도를 보지 않아도 잘 찾아갈 경지까지 올랐다.
아침 9시 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햇빛이 강해서 우리 모두는 챙이 넓은 모자와 썬글라스를 챙기고 산책을 나갔다. 상아빛 하얀 모래사장과 에메랄드 빛 바다는 내가 이곳에 오기 전 상상했던 것 이상이었다. 하얀 모래사장은 곱고 푹신푹신했다.
비치에서 한창 화보촬영을 한 우리는 비치에서 나와 Dmall로 향했다. 스테이션1과 2 사이에는 로드샵들이 즐비한 쇼핑단지인 Dmall이 있다. 이곳에서 우리는 다양한 샵들을 구경하였다. 수많은 비치웨어를 파는 옷가게와 보라카이 기념품 샵들이 즐비해 있었다. 또한 가이드북에서 보았던 레스토랑과 까페들이 우리의 발걸음을 잡았다. 간단히 둘러 본 후에 우리는 점심을 먹기로 하였다. 스테이션 3부터 스테이션 1까지 걷고 Dmall을 구경하고 나니 점심시간은 금방이었다.
우리는 Dmall에 위치한 유명 스페인 음식 전문점인 올레(olle)에서 간단한 점심을 먹었다. 이곳에서 790페소 콤보를 시켰는데, 5가지 메뉴를 우리가 고를 수 있었다. 우리는 5가지 메뉴로 조개구이와 그라탕, 오징어튀김, 미트 볼, 갈릭머쉬룸을 주문했다. 4명이 먹기에는 양이 많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비키니 수영복을 위해서 점심을 적당히 먹기로 하였다. 스테이션 3에서 1까지 왕복한 후 우리는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찝찝한 마음에 수영을 하고 싶었지만, 지글지글한 태양 아래서 수영을 하는 것은 거의 자살행위라고 판단하여 리조트 내의 수영장에서 수영복을 입고 만나기로 했다.
1시간 뒤 파라다이스 가든 리조트 야외 풀장에서 모인 우리는 한 바탕의 포토타임을 가진 뒤, 풀장에 뛰어들었다. 세상에! 풀장은 생각보다 엄청 깊었다. 1m 57cm 정도인데, 인공폭포가 내리는 곳은 수심이 2m가 넘어서 발조차 닿지 않았다. 우리가 기대했던 명품복근의 멋진 외국남은 없었지만, 우리는 누구의 의식이나 시선에 상관없이 초등학생으로 돌아간 것처럼 물 장난치며 신나게 2시간 동안 풀장에서 놀았다. 물장난 치고 씻고 나자 다시 배가 고팠다. 비키니를 입겠다고 점심도 적게 먹지 않았던가. 우리는 간식을 먹으러 다시 Dmall까지 걸어갔다. Dmall에서 발견한 완소 수제버거집인 Bite버거. 우리는 제일 큰 햄버거인 트리플X버거를 주문했다. 4명이 나눠 먹어도 배가 부른 이 거대한 햄버거 하나 가격은 겨우 340페소. 레모네이드 2잔과 함께 주문하니 400페소 가량 나와서 일행 4명에서 깔끔하게 100페소씩 내고 나왔다.
중간 간식을 먹고 나오자 금방 해질녘이다. 이곳에 오기 전에 한국 여행사를 통해서 썬셋 팔라우를 예약하고 왔다. 삼각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바다위에서 30분 동안 썬셋을 감상하는 이 프로그램은 보라카이에서 바로 신청하면 1인당 600페소가 든다. 하지만 미리 예약하고 왔다면 1인당 겨우 200페소에 즐길 수 있다. 우리는 5시 30분에 보라카이 내에 있는 한국인여행사에 갔다. 현지 가이드의 안내를 받고 바다에서 우리가 소망하던 푸른 삼각돛단배를 탔다. 이 돛단배는 따로 엔진 없이 자연풍으로만 움직이는 배다. 6시가 다되자 보라카이의 노을이 지기 시작했다.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누르면서 우리는 보라카이의 노을에 경탄했다. 30분은 금방 지나갔다. 우리가 좀 일찍 바다에 나왔는지 아직 보라카이의 하늘은 울긋불긋해지지 않았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채 저녁식사를 위해 우리일행은 리조트로 씻으러 돌아갔다. 하지만 나는 조금만 더 해변에 남아있기로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보라카이 썬셋의 하이라이트를 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그리고 10여 분 뒤, 하늘 전체를 물든 붉은 빛을 볼 수 있었다. 썰물로 빠져나간 모래사장에 고인 물에 빨강, 노랑, 주황, 보라, 남색의 오묘한 노을이 비춰져 거대한 팔레트를 연상케 했다. 내 카메라가 이 아름다움을 온전히 살리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저녁식사에는 늦어졌지만, 나는 내 일행이 놓친 보라카이의 보석을 내 기억 속에 담을 수 있었다.
저녁 식사는 해변에서 즐기는 뷔페였다. 저녁 6시쯤이 되면 해변 이곳저곳에서는 해변 간이식 뷔페를 준비하는 식당들로 북적북적된다. 가격은 250~400페소까지이다. 메뉴는 주로 씨푸드. 우리는 몇 바퀴를 돌고나서 한 명당 295페소인 뷔페에 들어갔다. 닭꼬치와 쌀국수, 게살스프, 조개 구이 등이 있었는데, 조개와 석굴 구이는 맛있었지만 다른 것들은 퍽퍽하고 차게 식어 있어 손이 가지 않았다. 이 뷔페에는 새끼돼지 바비큐도 있었다. 예전에는 새끼돼지를 먹는 필리핀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었는데, 실제로 먹어보니 살이 엄청 부드럽고 야들야들해서 계속 갖다 먹게 되었다. 2~3접시를 먹자 더 이상 먹고 싶지 않았다. 야채류는 거의 없고 메뉴 대다수가 고기류이다 보니 느끼해서 많이 먹을 수 없었다. 그래도 충분한 포만감을 주었다. 차라리 생선류나 조개류 같은 씨푸드가 더 많았다면…….
저녁 식사 이후 해변이 잘 보이는 야외 칵테일바에서 우리는 저렴한 칵테일 한 잔을 마시고 클럽으로 향했다. 피곤할 대로 피곤했지만, 멈출 수 없었다. 오늘이 보라카이 마지막 밤이기 때문이었다. 가이드북에서 추천한 해변 클럽인 길리스에 먼저 들어갔는데, 생각보다 비싼 술값에 놀라 바로 나와 버렸다. 그 건너편 코코망가스에서 우리는 자리를 잡았다. 탄두아이 아이스 한 병이 90페소라니! 역시 관광지 물가는 어느 나라를 가나 똑같은가 보다. 한 병씩 주문하고 춤을 추는데, 계속 음흉한 눈길을 보내는 아저씨들. 좋은 친구를 많이 만들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이곳에서는 무리라고 판단. 클럽은 역시 마닐라다. 이에 클럽걸인 R도 공감했다. 불만족스러웠던 클럽을 뒤로한 채 보라카이 럼 한 병과 사과맛 네스티를 사들고 Kaylee와 Stacy의 리조트로 갔다. 역시 보라카이 럼과 사과맛 네스티의 조합은 환상이다. 보라카이 럼의 은은한 코코넛향과 네스티 사과맛의 달콤함 그리고 끝에 느껴지는 럼주의 아쌀한 맛. 이것이 바로 보라카이의 ‘맛’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