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메트로 마닐라에 와서 처음 방문한 곳은 인트라무로스다. 쿠바오에서 지프니를 타고 말라테 마비니에서 하차 후 택시로 갈아타고 갔다. 나는 인트라무로스에만 3번 방문할 정도로 이곳을 사랑한다. 옛 스페인 정복자들의 거주지였던 인트라무로스는 600년 이상의 오래된 역사를 자랑하는 도시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폭격을 맞았음에도 옛 스페인 시절의 유적은 많이 남아 있어 예전의 모습과 규모를 추측해 볼 수 있다. 이 근처에서만 볼 수 있는 마차 칼레사(Calesa)'가 내 주변을 슬로우 모션처럼 지나간다. 인트라무로스에 지날 때면 칼레사에 타라는 호객꾼들로 인해 정신없다. 대개는 350~500페소를 부르는데, 주요 관광지마다 세워서 사진도 찍고 둘러볼 수 있는 시간을 준다. 나는 건강한 발이 있고 또한 시간에 쫓겨 가면서 이곳을 둘러보고 싶지 않아 칼레사를 타지 않았다. 하지만 37도를 오를락 내리는 땡볕더위에서 쾌적한 여행을 즐기고 싶다면 또한 특별한 추억을 남기고 싶다면 칼레사를 한 번 타보기를 권한다.
첫 번째로 이곳을 방문할 때는 인트라무로스 북쪽에 위치한 포트 산티아고에만 갔었다. 마닐라에 도착하고 멋도 모르고 간 곳이었기 때문에 이곳이 어떤 곳이었는지는 두 번째 방문쯤에 알게 되었다. 포트 산티아고는 스페인 지배시절의 요새다. 철제 요새 안으로 들어서자 길 가운데에는 분수가 있는 잔디광장이 있었고 주변에는 작은 가게들이 그림처럼 옹기종기 모여 있다. 그리고 총탄과 포탄 자국으로 곰보가 되어 전쟁의 흔적이 역력한 낡은 건물들이 보였다. 이들을 지나면 일본 지방영주의 성처럼 요새로 들어가는 거대한 석조조각의 아치형 문 주변에 물이 고인 작은 호수가 있다. 요새로 들어가는 관문에 다다르자 동판으로 만든 발자국이 요새에서 리잘파크까지 이어져 있다. 처형장으로 떠나는 필리핀 독립투사 호세 리잘의 마지막 발자국을 형상화한 것이다.
화려한 석조 관문을 지나자 넓은 잔디 광장이 있었다. 그리고 광장 한가운데에는 호세 리잘의 검은색 동상이 서 있다. 의사이자 과학자, 문인으로 활동한 그는 스페인 유학에서 돌아온 후 필리핀 민족동맹이라는 단체를 조직하였다. 1896년 반식민 폭동 공모 혐의로 체포되어 처형됐다. 마지막 필리핀으로 불리는 그는 필리핀의 국민 영웅으로 추앙받아 그의 이름을 딴 공원, 건물, 지역 등이 있다. 요새 안에는 호세 리잘의 행적을 엿볼 수 있는 박물관이 있다. 입장료는 10페소정도 했었던 것 같다. 이곳에는 그의 일대기를 다룬 그림들과 그의 유품들, 리잘의 초상화와 함께 처형되기 전날 썼던 마지막 시(나의 마지막 작별)가 여러 나라 버전으로 번역되어 전시돼있었다. 박물관에서 나와 경사로를 따라 성벽 위로 올라가면 메트로 마닐라를 남북으로 가르는 파시그강(Pasig River)과 강 건너편 현대식 빌딩이 빼곡하게 들어선 마닐라 시내가 보인다.
1571년 필리핀을 점령한 스페인은 필리핀인들을 강제로 동원해 성벽을 세우고, 스페인 총독을 비롯한 스페인 사람들과 그들의 군대만 이곳에 머물렀다. 성벽 오른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지하 벙커처럼 보이는 복잡한 구조의 지하 감옥이 보인다. 지붕이 없어진 채 내부를 드러내 보이고 있는 이 감옥은 한눈에 보아도 수면보다 낮게 위치해있어 탈출은 엄두도 못낼 것 같았다. 또한 물을 넣었다 뺐다할 수 있어 죄수들을 수장시키고 시체는 강으로 흘려보낸 악명 높은 감옥이었다.
포트 산티아고 이후에 나는 마닐라 대성당과 성 어거스틴 대성당 그리고 스타벅스에 갔다. 필리핀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마닐라 대성당에 도착하자 마침 필리핀 신혼부부의 웨딩 촬영이 한창이었다. 이곳에서는 웨딩촬영이나 결혼식을 올리는 장면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마닐라 대성당은 가톨릭 포교의 중심지로서 스페인 식민지배시대인 1581년에 처음 건축되었으며 화재와 지진, 전쟁 등으로 파괴되어 여러 차례 재건되었다. 지금의 건물은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국의 공격으로 완전히 부서진 것을 1945년에 다시 짓기 시작하여 1958년에 완성한 것이다. 필리핀 건축가 페르난도 오캄포(Fernando Ocampo)가 로마네스크-비잔틴양식으로 설계하였고, 바티칸의 원조를 받아 과거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였다. 특히 필리핀의 종교적 상징주의를 표현한 스테인드글라스 창과 대성당의 역사를 나타내고 있는 청동문이 유명하다.
필리핀 사람들이 결혼하고 싶어하는 장소 1위로 꼽히는 성 어거스틴 교회(San Augustin Church)는 필리핀에서 가장 오래된 스페인시대의 성당이다. 수차례의 지진이나 전쟁공습 안에서도 원형 그대로의 모습을 보존하여 '기적의 교회'라고 불린다. 1993년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되었다. 아름다운 샹들리에와 스테인드 그라스, 프레스코화 등이 보존돼 있으며 성당의 지하무덤에는 스페인 초기 탐험대와 총독, 주교 등의 시신이 묻혀있다.
인트라무로스의 오래된 거리를 걸으며 사진 셔터를 신나게 누르다 보니 다리도 아프고 온 몸이 땀범벅이 되었다. 빨리 앉아서 쉬고 싶다는 마음을 품고 찾아 간 곳이 이곳의 명물 스타벅스. 이곳의 스타벅스가 명물이 된 이유는 일반적인 스타벅스와는 다른 인테리어 구조 때문이다. 첫 번째 방문했을 때는 부활절 휴일로 문이 닫혀 있어 인트라무로스에 3번이나 방문하고 나서야 나는 이 명물 스타벅스 안에 들어갈 수 있었다. 마치 스페인시대 지하 감옥처럼 아치형 석조 구조물 안에 위치한 스타벅스 인트라무로스점에서 관광 후 마시는 캬라멜 마키아또의 맛이란! 필리핀 스타벅스에서만 맛볼 수 있는 망고 쉐이크도 강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