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갑자기 추워졌었던 9월의 어느날. 두툼한 파카까지 꺼내입는 사람이 있었을 정도로 기온이 갑자기 뚝, 떨어졌던 때가 있었다. 그런 날이 며칠이나 계속 되었을까. 벌써부터 날씨가 이러면 겨울엔 어찌 견디겠냐, 는 볼멘소리가 나올무렵, 우리나라 3한 4온이 이곳에도 적용되는 것인지 3일정도 춥던 날씨가 갑자기 포근해졌다. 그러나 분명 춥지 않고 포근한데 무언가 우중충하고 찌뿌둥한 날씨였다.
살면서 가끔 무서울 정도로 나의 말이 현실로 나타났던 날이 존재했다. 동생을 잃어버려 장장 10시간 만에 찾던 날, 나는 사촌동생과 그림을 그리며 이렇게 말했었다. 아, 동생없이 우리 둘이서만 이렇게 그림 그리니까 크레파스 쓰기 편하다, 그치? 해는 없지만 이상하리 만치 따뜻했던 그날 저녁에도, 나는 함께 밥 먹는 친구에게 왠지 오늘 무슨 일 생길 것만 같아, 란 말을 던졌었다. 물론 그날 저녁 생사를 가를 일이 생길 것이란 예상은 전혀 하지 못한 채, 달콤한 초코케익을 한 스푼 입에 물면서.
그날 저녁 일은 정말 생겼다. 저녁 8시쯤 되었을까, 초등학교 때 민방위 훈련한다고 흘러 나오던 사이렌 소리가 갑자기 기숙사를 뒤흔들었다. 민방위 훈련이 뭐냐고 물어봤던 우리들에게, 선생님께서는 북한이 쳐들어오는 것을 대비해 연습하는 것이다, 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끝날 때까지 우리 역시 책상 밑에 움크린 채 나가지 못했다. 지금 나가면 큰 일 난다는 선생님의 무서운 경고와 함께. 물론 시간이 지나며 그것이 아니란 것을 스스로 깨닫게 되었지만, 여전히 사이렌 소리는 무서운 존재다. 그런데 그 사이렌 소리가, 한국과 14시간 떨어진 지구 반대편 이 곳에서 울리고 있다.
토네이도란다. 살면서 물이 방문 앞까지 차온 홍수나 태풍의 경험, 폭설의 경험, 간접 지진의 경험은 있어도 토네이도는 도통 무엇인지 감도 오지 않고, 어떤 재해인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일단 비상 대피소로 대피해야 하는데, 그 곳이 화장실이란다. 모두 화장실로 대피하라, 이것인데, 뭐 도무지 믿기지도 않고, 또 그렇다고 무시하자니 방법이 없지 않은가. Desperate Housewives(위기의 주부들)에서 본 토네이도 장면은 또 왜그렇게 생각이 나는 것인지.(정확히 말하자면 토네이도 후 마을이 다 붕괴되고, 많은 사람들이 죽을 뻔하거나, 실제 죽었던.)
9월의 그 때로 돌아가보자. 지금이야 매일 얼굴 맞부딪치고 산 지 5개월이 지났으니, 친해지지 않을래야 친해질 수 없고, 또 워낙 우리 층의 분위기가 화기애애한 덕에 모두가 가족 같다만, 9월 초순 쯤이었던 그 때만해도 아직 룸메이트와 서먹서먹, 미국 문화에도 아직 완전히 적응하지 못해 약간 붕- 뜨는 느낌이 있었달까. 아직까지 미국보단 한국에 정을 붙이고 있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그런데 토네이도란다. 토네이도가 어떤 것인지 아직 감도 오지 않는 나와 다르게, 룸메이트는 나 캔자스 출신이니 걱정말라, 한다. 캔자스가 평지에 위치한데다 산이 많이 없어서 토네이도가 발생할 확률이 높아 그녀는 꽤 많은 토네이도를 겪어 온 모양이다. 그녀 말로는 지금 우리가 있는 지역은 산이 많아서, 토네이도가 와도 크게 번지지 않을 것이란다. 걱정말라고, 걱정말라고, 그녀는 검은 머리의 동양소녀를 토닥인다. 이 방안에 믿을 것이라곤 우리 둘 뿐이다, 는 그 생각이 얼마나 사람을 가깝게 만드는 것인지 그 때 처음 깨달았다. 지역, 국가, 나이, 인종 모든 것을 떠나 그녀와 나의 모든 것이 가깝게 느껴졌다. 그녀와 마주앉은 거리만큼 마음의 거리가 가까워진다.
그러나 토네이도의 상황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경보는 더욱 심해졌고, 얼른 화장실로 들어가 문을 닫으라는 경보가 급박하게 울려퍼졌다. 무엇인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그 때까지만 해도 선뜻 결정을 못내렸던 학생들이 방 밖으로 몰려나왔다. 룸메이트는 어디론가 뛰어간다. 그녀와 한 살 터울인 여동생이 위층에 있었다.
걱정말라는 룸메이트의 말과 함께 나는 혼자 남았다. 그 때 누군가 울음을 터트렸다. 옆, 옆방에 사는 Rebeka였다. 사실 누군가 울음을 터트려야 할 상황이라면 그녀는 아닐 것이라 생각했다. 잠깐의 이미지가 모든 것을 설명해주는 것은 아니지만서도, 평소 그녀는 당찬 이미지에, 무엇보다 항상 계단에서 남자친구와 진한 스킨십을 즐겼기에, 울음을 터뜨릴 사람은 그녀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녀가 어린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그녀의 룸메이트 역시 아직 방에 들어오지 않았는지, 그녀 역시 혼자 발을 동동 구르며 눈물방울을 뚝뚝 떨궜다. 평소 그녀와 친하지 않았지만, 그녀를 달래주어야만 할 것 같은 의무감이 들었다. 알고보니 나보다 2살어렸던 그녀가 내 팔을 붙잡았다. 괜찮아, 다 괜찮아 질거야, 우린 서로에게, 또 자신에게 그 말을 되뇌이고 또 되뇌었다.
아주 어릴 때 토네이도를 겪었다는 그녀는 그래서인지, 토네이도라는 말에 나보다 훨씬 겁을 먹고 있었다. 나야 뭐, 아예 모르니 공포가 훨씬 덜 한 것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녀의 머릿속에, 혹은 그녀의 무의식에 들어가 있는 토네이도는 그녀를 쉽게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모양이었다. 우리는 함께 화장실에 들어갔다. 그 날 따라 우리층에는 사람이 많이 없어서, 우리 외에 3명의 여학생만이 더 있을 뿐이었다. 총 5인 셈이다. 담요를 들고나온 누군가가 화장실 바닥에 그것을 깔았다. 모두가 담요위에 쭈그리고 앉아 라디오를 듣는다. 핸드폰으로 실시간 문자가 날아왔다.
그 때였다. 누군가 우리 꼭 피크닉 온 것 같지 않니, 란 말을 했다. 그 얘기에 모두가 긴장이 풀어진 채 웃음을 터뜨렸다. 미국 화장실은 한국화장실과 달리 습기가 거의 없기에 바닥이 그리 불결하지도 않았고, 더군다나 이렇게 담요까지 펼쳐놓고 여자 5이서 둘러앉아 있으니 정말 피크닉과 다를 바가 없었다. 누군가가 가방에서 메니큐어를 꺼냈다. 방금 메니큐어를 사서 들어오는 길이란다. 다 같이 메니큐어를 바르기로 했다. 바르다가 튀어나온 부분을 없애야 하는데 면봉이나, 솜이 아닌 화장실 휴지로 문지르다 보니 잘 지워지지도 않고 마구잡이로 번지기만 한다. 또 그 모양새가 우스워 웃음이 난다. 20분 정도만 있으면 토네이도가 비켜나갈 것 같다는 문자 메시지가 도착한다. 그 문자메시지가 오는 소리가 들리지도 않을 정도로, 우리의 이야기는 재밌어만 간다. 토네이도에게 들릴 만큼, 우리는 화장실안에 갇혀 큰 소리로 웃고, 떠들었다. 토네이도는 하나도 무섭지 않은 것 처럼.
1시간 후 쯤, 20분 후면 지나간다는 문자를 한 3번은 더 받은 후에야, 정말 토네이도는 우리 마을을 완전히 지나갔다. 나중에 뉴스를 보니 사상자는 아무도 없었다 한다. 그러나 몇 몇 부상자가 발생했고, 학교 표지판들은 한 동안 제자리를 찾지 못했으며, 가을 낙엽 역시 우수수, 떨어져 버리고 없었다. 그러나 토네이도가 모든 것을 파괴하고만 간 것은 아니었다. 토네이도가 지나간 자리에는 여학생들의 우정이 새로 싹터올랐다. 아, 빠질 수 없는 또 하나가 더 남아있다. 손에 징표처럼 칠해진 빨간 메니큐어를 우리는 '토네이도의 선물'이라 부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