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 애플. 처음 이 뉴욕의 귀여운 애칭을 들었을 때가 생각난다. 뉴욕하면 무엇이 생각나느냐는 브레인 스토밍을 하는 중이었고, 누군가 빅 애플, 이란 이 단어를 얘기했었지. 해마다 12월 31일이면 신년맞이 카운트와 동시에 타임스퀘어 전광판에서 떨어진다는 빅 볼. 그 이름을 따 뉴욕엔 빅 애플이란 애칭이 생겼다했다. 1908년 12월 31일 뉴욕 타임스의 신사옥 완성을 기념하기 위한 큰 파티에서 비롯된 이 멋진 행사는, 그러니까 이제 100년을 지나오고 있는 셈이다.
그 때는 상상이나 했었을까. 내 눈앞에 정말 그 빅볼이 떨어지는 그 순간을. 2009년의 마지막 날. 뉴욕 타임스퀘어에 선 나는 수십만의 인파와 함께, 미당의 시처럼 섭섭하게, 그러나 아조 섭섭치는 말고 좀 섭섭한듯만 하게, 나의 스물 둘을 놓아주었다.
연일 미국이 불안하다 싶더니만, 역시나였다. 수십만의 사람이 모이는 42번가 타임스퀘어 광장은 저녁 6시부터 통제되었고, 42nd 스트릿과 15블럭이나 떨어져 있는 57street에 서야 통제가 겨우 해제되었다. 타임스퀘어가 6시부터 통제되었다는 것을 몰랐던 나는 맥주나 마시며 기다릴까, 하는 마음에서 나름 이르다고 생각한 8시쯤 집을 나섰다. 엄격하게 바리케이트를 치고 통제하는 경찰을 본 후에야 아차, 하는 마음과 동시에 좀 더 일찍나섰어야 함을 깨달았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늦어버린 것을. 타임스퀘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당일 뮤지컬 티켓이 있거나, 근처 호텔 숙박중이거나, 근처 식당에 예약한 경우가 아니면 무슨일이 있어도 들어갈 수 없단다. 그 3가지도 아주 철저하게 검사를 하는데, 근처 호텔 숙박 키의 모형을 모두 본 떠 하나하나 대조할 정도였다. 그러니 이 경찰을 뚫고 꼼수를 써 들어가는 것은 애초에 시도조차 불가능한 일. 열심히 걸어 바리케이트가 쳐지지 않았다는 57번가로 걸어가 그나마 잘보이는 자리라도 선점하는 것이 최선의 길이다.
<아니나다를까 타임스퀘어에는 수십만의 인파가 몰려들었다.>
그리하여 30분을 열심히 걸어 57번가 까지 올라갔다. 그런데, 57번가에서도 그냥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모든 금속물질을 제거해서 공항에서 보안검사를 받듯이 몸수색을 하고, 가방 검사까지 일일히 마친후에야 타임스퀘어가 보이는 쪽 57번가로 들어설 수 있었다. 그러나 이미 42번가와 15블럭이나 떨어진 이 곳에서도 사람이 바글바글. 더군다나 한쪽에선 타음스퀘어 쪽 통제를 풀어달라는 시위까지 하고 있다. 짖궂게도 비와 눈이 섞인 굵은 빗방울까지 떨어져 타임스퀘어의 새해맞이는 더욱 정신없어져 간다.
<42번가와 꽤 떨어진 57번가에서도 몸수색과 가방검사를 받아야 한다. 57번가 앞 길게 늘어선 줄.>
그래도 나름 자리를 잡아 타임스퀘어가 보이는 쪽에 서긴 했는데, 이거 보이려나? 아, 보인다 보여! 워낙 타임스퀘어의 전광판이 커서인지 약 반마일 정도 떨어진 이곳에서도 타임스퀘어의 전광판이 뚜렷하게 보인다. 15블럭 떨어진 이 곳에서도 보이는 도시바의 광고란. 도시바란 브랜드네임이 평생 머리속에서 지워지지 않을 것 같다. 그렇게 2시간 동안 12시 카운트다운을 기다리는데, 아 정말 사람은 많고 비는 오는데, 들어선 사람들 속에서 한 걸음조차 제대로 움직일 수 없고, 어그부츠를 신었음에도 발가락은 점점 감각이 없어져 간다. 전광판에는 가끔 타임스퀘어 쪽 사람들을 생중계로 비춰주는데, 그 때마다 와-하는 함성을 지르는 것도 한 두번이지 뉴욕의 동장군앞에서 사람들은 점점 지쳐간다.
<타임스퀘어와 무려 15블럭 떨어진 57번가에서 보는 타임스퀘어. 앞은 모두 사람들로 가득 메워져있다.>
이제 11시. 한시간이 남은 순간 1시간이 남았다는 타임스퀘어 전광판의 불이 켜진다. 순간 수십만 인파의 환호가 그 넓은 뉴욕을 가득 메운다. 수십만 사람들의 환호와 2010년이 한 시간 남은 상황. 이것 참 짜릿하다. 그냥 갈까, 했는데 아, 요놈 참 제때 맞춰 사람을 다시 붙잡는다.
그런데 이럴 때 꼭 얄미운 사람들이 존재하는데, 모두다 불편하고, 뒤엉켜 있는 상황에서 자기만 편하겠다고 하는 사람들이다. 비는 오고 사람은 많고 정말 앞 사람의 어깨 너머로, 옆 사람의 옆구리 사이로 전광판을 바라본다. 모두가 비오는데 우산을 쓰기는 커녕 발이 밟히고 모르는 사람과 볼을 맞대고 있는데, 집채만한 우산을 펴서 사람들의 눈과 공간을 막는 사람들이 있다. 자, 구호나간다. FOLD THE UMBRELLA! 모두가 다같이 폴드 디 엄브렐라, 를 외치는데 난 바로 내 앞사람이 모자를 쓰고 있음에도 우산도 떡하니 쓰고 있기에 더 크게 외쳐준다. 그런데 진작 사람들의 눈을 신경쓸 사람들 같았으면 그렇게 하지도 않았을테지. 아니나다를까 사람들의 구호에도 꿈쩍도 안한다. 이거 완전 쇠우산이다. 카운트다운까진 이제 10분정도 남은 상황. 사람들의 구호는 점점 더 거세져가고, 마침내 마지막 우산족 2명이 우산을 접는다. 덕분에 우리들의 새해맞이는 조금 더 또렷해진다. 모두들 빗속에서 웃음꽃이 핀다.
드디어 기다리던 60초 카운트 다운이 시작된다. sixty부터 시작된 구호는 마침내 ten, nine,eight, seven, six, five, four, three, two, one!! 마침내 Happy New Year, Happy 2010이다. 방금까지만 해도 발가락은 얼어 감각도 없고 볼은 차가워질대로 차가워지고 카메라 셔터를 누를 힘조차 없었는데, 2010년이 되자마자 새로운 에너지가 충전되는 것처럼 모두들 바람에 일어서는 풀처럼 다시 살아난다. 사랑하는 사람과 키스를 나누고 포옹을 하고, 휘파람을 불고 폭죽이 터진다. 우린 세계 어디에서 온 지도 모르는, 서로의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이지만 이 순간만큼은 최고의 순간을 함께 나눈 동지들이 되어 함께 웃고, 사진을 찍고, 포옹을 한다.
<카운트다운과 함께 뉴욕의 밤하늘을 수놓은 불꽃놀이>
<카운트다운이 끝난 거리는 여전히 사람들로 북적북적 하다.>
아무래도 2010년이니 나도 옆의 J에게 한마디 한다. J. 2010년도 우리 함께여서 행복한 한 해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