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댓글 남기려니 뻘쭘하지만 제 어릴 때를 보는것 같고, 진지하게 올리신거 같아서 긴 글 남기고 갑니다. 뭐 20대 중반이라서 나이가 훨씬 많고 그렇진 않지만, 그래도 인생 경험이 조금 더 있으니 댓글 남겨 볼게요. 이미 윗분들이 말씀하신걸 재차 말할 거지만, 더 와닿도록 조금 더 살을 보탭니다.
1.
저 또한 글 쓰신 분과 같이 14살, 즉 중학교에 들어갈 때 쯤부터 명확한 꿈이 있었고 지금도 그 꿈을 이루려고 하고 살고 있습니다. 상도 자주 탔고, 주위에서 많은 기대와 칭찬을 들었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미국 상위권 대학에 다니던 학부 때는 대가의 밑에 들어가 연구를 했고, 호평에 인색한 그분께 굉장히 주목을 받았었고, 다른 교수들에게서도 매번 칭찬을 들었습니다. 남이 보기에는 굉장히 성공적인 케이스죠. 어릴 때부터 넌 크면 성공할거라는 말을 주변에서 들어왔었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그래도 먼 미래를 생각하면 막막합니다. 자연스러운거라고 생각해요. 아무리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거에 익숙해도 완전 새로운 환경에 갈 생각을 하면 막막해지는 것도 당연하고요. 사실 이러한 막막함과 자기부정은 남이 보기에 성공적인 사람들에게서 굉장히 많이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특히 박사생들 중에 self-doubt 및 imposter syndrome (자기가 모르는 건데도 아는 척한다고 느끼는, 자신의 실력과 지식을 부정하는 마인드)를 느끼지 않는 학생들은 거의 없어요. 나름 고등학생 때 공부를 잘 했고, 대학교 학부에서 교수들에게 인정받고 남들도 다 똑똑하다고 칭찬하고, 그렇게 그렇게 연구를 하고 남이 보기엔 '전문가'가 되기 직전에도 그렇다는 거죠. 교수들도 마찬가지에요. 지식과 지적 능력으로 인정을 받고 성공하더라도 자신의 지식의 한계를 알기 때문에 자신은 잘 할 수 있다, 또는 잘하고 있다는 감정과 내가 과연 잘할 수 있을까, 모르는데 그냥 말만하고 있는건 아닐까 하는 양가감정이 생기는거죠. 그런 면에서 님께서 느끼는 감정은 무수한 사람들이 느끼는, 굉장히 보편적인 감정입니다. 그 감정을 어떻게 지혜롭게 다스리고 나아가느냐가 관건인데, 그건 연배가 쌓이고 경험을 더 하다보면 생기지 않을까 싶습니다.
[요약: 양가 감정은 공부하는 사람에게 굉장히 보편적인 감정입니다.]
2.
그리고 도움 되는 한가지 방법은 윗분들께서 말했다시피 고독하게 지내지 말라는겁니다. 혼자 하는 싸움이 아니에요. 또래들보다 보다 일찍 시작하셨다고 했는데, 대학을 어느 대학으로 가실진 모르겠지만 미국 상위권 대학(US뉴스 랭킹 기준 대충 이십몇위인 리서치 사립 대학이나 그보다 랭킹이 높은 학교들을 기준)으로 가시면 님처럼 일찍이 어느 분야에 흥미를 갖고 준비한 애들 꽤 보실겁니다. 게다가 늦게 그 분야에 관심이 생겼지만 타고난 두뇌로 날고 기는 애들도 많이 보실거고요. 아니면 자신과 엇비슷하게 똑똑해 괜히 경쟁심리 생기게 하는 학생들도 만날겁니다. 결국 그런 학생들을 보면서 배우는건 자신이 (똑똑하긴 하지만) 막 특별한 것은 아니다, 그런거더라고요. 그걸 처음 느끼는 순간에는 자기회의감이 커지면서 두려울 수도 있는데, 결국은 모든걸 자기 중심적으로 사색만 하던 습성이 어느정도 걷히고 주변의 사람들이 보이게 되더군요. 뭐 학부생 레벨에서 비교만할게 아니라, 아무리 제 아무리 뛰어나고 이름을 날린 학자라고 해도 한분야에서 '가장 특별한' 학자는 없죠. 어떠한 개인이 '이 학자가 가장 특별해!'라고 한명을 집을 수는 있겠지만, 사람들 마다 다른 이름이 나오기도 하고요. 노벨상 탄 사람이 특별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사실 그 상은 매년 주는 상이죠. 결국은 아무리 똑똑하더라도 나 혼자 '특별하게' 똑똑한 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기에 학문은 자기 혼자 불안해 하면서 하는게 아니라 남들과 같이 협력하고 생각을 교환하고 비평하고 발전시켜주면서 나아가는거고요. 지금 당장 성공할 필요도 없고, 어느 프로젝트가 실패했다고 낙담할 필요도 없고, 불안해 할 필요도 없는 겁니다 (완전히 떨칠 수는 없겠지만). 눈 앞에 놓인 관심사를 개발하고 그 과제에 성실히 임하시고, 자신이 부족한 점이 있으면 동료 학자들과 비평할 수 있는 기회도 있을 것이고 (그래서 peer-reviewed journal에 학자들이 열심히 투고하는 거고요)...어쨌든 님만 고독하고 특별하게 싸우는게 아니라 주변의 다른 우수한 사람들과 같은 길을 걸어간다는걸 기억하시면 될 것 같네요.
[요약: 자신이 막 특별하지 않고 자신만큼 똑똑한 사람들이 많다는걸 실제로 체험하게 되면 불안함이 (역설적으로) 많이 해결될 겁니다.]
3.
그런 점에서, 글쓰신 분 아버님께서도 말씀하셨듯이, 지금 하고 있는거에 집중하세요. 자신이 성공하고 안하고 그건 지금 열심히 하고 있는게 풀리면 가능해지는겁니다. 괜히 먼 미래를 바라보다간, 저널에 리젝 한번 먹고 무너지고 교수한테 어느 부분에서 한번 혹평 듣고 (아무리 자신을 밀어주는 교수라고 해도 보육원이나 중고등학교 선생님들처럼 우쭈쭈쭈 안합니다. 학부에서 대학원 건너오면 더 심할거고요) 무너지고... '나는 꼭 성공해야 하는데, 나 이렇게 밖에 못해선 나중에 이도저도 아니게 되는거 아냐?' 이런 생각도 들게 되면서 더 불안해질겁니다. 그리고 좋아하는 분야에서도 혹평까진 아니더라도 자신이 생각치 못한 부분에서 비평을 하면서 질문을 해오면, '성공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 잡힌 사람은 그것을 위기로 느끼겠죠. 자신의 연구에 자신이 생각치 못한 점이 있었다는 거니까요. 하지만 성공해야 한다는 강박관념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밀어두고, 지금 공부하고 있는 것이 왜 흥미로운지, 자신이 어떻게 기여를 할 수 있을거 같고, 그게 왜 이 사회에 중요한지 등, 자신이 공부하는 그 분야에 몰두해서 순수한 목적으로 연구하다보면 미래에 대한 불안감도 많이 사라져 있는 자신을 보게 될 겁니다. 지금도 할 게 너무 많고, 재밌는게 너무 많거든요.
[요약: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집중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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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아직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않은 학생분께 구구절절 이야기 하자니 웃긴 꼴이긴 하지만, 제가 고등학생 때와 대학교 학부 1학년 2학년 때 들었으면 도움이 되었을 것 같은 말들을 해보았습니다. 어느정도의 불안감과 자신감을 동시에 느끼는 것과 같은 양가감정이 없는 건 아니지만, 글쓴 분과 같은 감정은 더 이상 느끼지 않거든요. 하지만 저도 글 쓴 분의 나이였을 때와 대학교 들어와서 처음 2년간은 '내 성격이 이상한건 아닐까,' 막말로 '내 성격 싸이코 같아'라는 생각이 들정도로 양가감정이 너무 심했습니다. 뭔가 말도 안될 정도로 자신만만하다가도 정말 나 잘하고 있는걸까 불안함을 느끼고, 어릴 때부터 많은 기대를 받아온 것에 익숙해져, 그 기대에 미치면 못하지 생각하기도 하고. 모든게 너무 부담이 되면 정말 전부 내려놓고 긴 편지 가족과 교수님들께 구구절절 남겨놓고 학교에서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렇다고 조울증처럼 병적인 증상은 아니었던게, '내가 아는 것이 무엇인가,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지식과 인식의 한계에 대한 두려움에 부딫힐 때마다 이렇게 느꼈었거든요. 그게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이어지고 제 자신에 대한 회의로 이어지고... 어쨌든 이래저래 부대끼면서 경험이 쌓이고 그런 감정에 휩싸이지 않게 되니 삶의 질이 전반적으로 엄청 나아졌습니다. 남이 백번 말해도 자신이 경험하는 것보다는 못하지만, 그래도 아무 말을 안드리는 것보단 도움이 될거라 느껴서 여유 시간에 답글 남겨드립니다.
그럼 화이팅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