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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홍콩으로 가게 되었다. 나는 학교생활도 그럭저럭 재미있었고 다른 나라에 대한 거부감도 없지 않아 있었기 때문에 홍콩에 가서 살고 싶은 마음이 그다지 없었다. 그리고 그 때는 홍콩이 어디 있는지, 유명한 건 무엇인지, 어느 나라 말을 사용하는지와 같은 기본적인 것조차 아는 게 없는 외계의 곳이었기 때문에 별로 내키지 않은 것도 있었다. 홍콩으로 이사가기 직전부터 영어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영어학원에선 대충 문법하고 단어 위주로 배웠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 했던 공부가 별로 효과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그저 다른 평범한 학생들처럼 영어학원에 ‘왔다갔다’ 식으로 다닌 것 같았기에. 그렇지만 주사위는 던져졌고 우리 가족은 홍콩으로 출국했다. 어렸을 때 제주도행 비행기를 탄 이후로 두 번째 비행기 탑승이자, 나의 첫 번째 외국행이었다. 나는 설렘, 걱정, 기대 등이 교차하는 기분을 안고 한국을 떠났고, 이 날은 앞으로 나를 180도 바꾸어놓을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된다.
나의 첫 외국 학교에 처음 들어갔을 땐 내가 의사소통도 제대로 못하는데 외국인들이 바글거리는 국제학교에서 즐겁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라는 두려움부터 앞섰다. 홍콩은 나의 첫 외국생활이었고 영어권 학교에서 영어를 배운다는 것도, 아니 영어로 모든 과목을 수업한다는 것도 난생 처음이었다. 물론 앞서 언급했듯이 한국에서 영어학원도 다녔지만 사실 한국에선 영어로 말할 기회가 많지 않았다. 아니, 거의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설령 기회가 있었다한들 성격상 잘 나서지 않던 나에게, 소위 말하는 ‘얼굴에 철판 깔고’ 맞든 틀리든 영어로 말하라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홍콩에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적응하려면 어떻게든 학교 선생들 말을 잘 알아들어야 했고 반 아이들과는 미숙하게나마 커뮤니케이션이 필수적이었다. 그런데 무섭기로 악명 높은 선생이 내 담임이 되었고, 정말 한 학년 내내 마음을 졸이면서 산 것 같다. 시도 때도 없이 아무것도 아닌 일에도 소리를 질렀기 때문이다. 그래도 ESL 담당이었던 선생은 착하고 재미있었다. ESL반에는 영어를 잘 못하는 학생들이 모여서인지, 왠지 모를 동질감과 유대감이 생겼고 ESL 학생들끼리 보다 더 친해지게 되었다. 처음으로 과학, 역사 등을 영어로 다 수업하면서 전혀 알아듣지 못하겠는 것도 많았고 어떻게 해야 될지 난감한 그런 것도 많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나아졌던 것 같다. ESL에선 매일 단어시험이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한국의 학원들처럼 단어와 그 뜻에만 기계적으로 집착하는 게 아니라 영어로 다양한 활동들을 하면서 영어도 많이 늘고 친구도 많이 사귈 수 있었다.
지금 그 당시 성적표를 보면 어떻게 이런 점수가 나올까 참 한심스럽기도 하다. 아주 초반엔 D학점이 쉽게쉽게 나왔고 C학점이 내 성적표를 거의 한가득 메꿨다. 2학기 때는 좀 좋아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쉽지만은 않았다. 아직도 기억나는 게, 항상 C를 맴돌던 과학 수행평가에서 어쩌다가 반평균보다 훨씬 높은 B+를 받고는 반 학생들한테 많이 축하받은 적이 있다. 담임도 진심으로 축하한다며 앞으로도 열심히 하라고 하셨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고작 수행평가 하나에서 고작 B+를 받고는 그렇게 좋아하고 축하받나 싶지만 그만큼 모든 과목을 처음으로 영어로 공부하기가 어렵고 험난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싶다. 외국에서의 첫 한해: 성적은 거의 바닥이었지만 많이 배우고 느끼고 친구도 많이 사귀고 그러면서 즐겁게 잘 생활한 것 같다.
홍콩에서의 2년차 때는 1년차 때보다 훨씬 재미있었다. 영어 실력도 많이 좋아졌고 웬만한 의사소통 및 기본적인 대화는 가능했으니까. 하지만 그때까지도 매번 말을 하기 전에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될까’ 생각한 후 그 문장을 영어로 영작하고 그런 후에 말을 한 것 같다. 이른바 ‘토종 한국인’들이 사용하는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그만큼 언어의 장벽은 여전히 너무 컸고 언어가 마음처럼 쉽게 배울 수 있는 학문이 아니라는 점도 깨달았다. 한 번은 옆에 앉았던 반 친구가 다른 애와 대화를 하다가 ‘Did you know that the principal got fired?!’라고 물어보았고 ‘Oh my gosh, really??’ 라는 답변이 들려왔다. 옆에 앉아서 그냥 듣고만 있던 나는 fire이란 단어를 듣고는 ‘...불이 나서 교장이 타죽었나? 많이 다치신 건가? 헐...’ 이라고 속으로 생각했고 그 이후 더 이상 교장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줄로만 철썩같이 믿고 있었다. 그러고는 몇 년이 지난 후 깨닫게 되었다: ‘불’과는 전혀 상관없는 ‘해고’ 당한 것이라는 사실을…… 이처럼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게 쓰는 표현들이 어렵고 복잡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고 전달하고자 하는 표현과 정반대로, 다르게 알아듣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 해부터 ESL 반이 intensive와 supportive 두 반으로 나뉘어졌고 intensive반은 영어를 많이 필요로 하는 역사, 과학같이 어려운 과목들을 들어야 할 시간에 ESL반에서 영어공부를 더 하게끔 해줬는데, 나는 무작정 학생들에게 에세이만 쓰라고 하고 정작 본인은 쉬던 선생의 supportive반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7학년 때에는 영어가 웬만큼 되니까 숙제하는 데 걸리는 시간도 줄었다. 그 때는 교과서를 읽고 리딩과 관련된 질문을 답하는 숙제가 많았는데 그냥 교과서에 있는 문장을 통째로 베끼거나 매일 아침마다 애들이랑 상의하거나 모를 때는 애들 숙제 베껴가면서 숙제는 그래도 쉽게 한 것 같다. 열심히 한 끝에 나는 11월에 ESL반을 졸업하고 Language Arts반에 들어가서도 그럭저럭 어렵지 않게 공부할 수 있는 실력이 되었다. 그런데 솔직히 그 해에는 한국 아이들하고만 주로 놀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 학년에 반이 3개씩 있었지만, 반과는 무관하게 한국애들이 남녀 할 것 없이 3명이상이 떼거지로 스케이트장도 가고 놀이공원도 가고 정말 재미있게 놀았던 것 같다. 이제는 각자 자신의 삶을 잘 살고 있지만 지금까지도 그 때 친구들과 종종 연락하곤 한다.
그렇게 재미있게 놀다가 이듬해 3월에 영국계 학교에서 시험을 보러 오라고 통보가 왔다. 홍콩에는 정말 다양한 퀄리티와 커리큘럼의 국제학교들이 수십 개가 있고 처음에 오면 영어가 안 되니 대다수가 무시험 학교들을 가지만 2~3년 후 영어가 웬만큼 되면 입학시험을 치고 보다 좋은 학교로 전학을 가는 게 관행처럼 여겨져 왔다. 특히 교육열이 장난 아닌 한국인들 사이에서는 더더욱. 그렇기에 내 부모님도 더 좋은 학교에 원서를 넣었던 것이지만 나는 학교를 재미있게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솔직히 학교를 옮기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지원을 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학교를 하루 빠지고 새로운 학교로 입학시험을 보러 갔다. 시험은 독해 문제와 특정 그림을 보고 그 그림에 대한 에세이를 쓰는 게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시간이 촉박했던 나머지 에세이의 결론 부분을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하고 나와야 했다. 독해는 어렵지는 않았지만 에세이는 질도 별로여서 그냥 떨어졌으려니 생각하고 원래 학교를 계속 잘 다니고 있었다. 그런데 2주 후 전화가 와서 합격했다고 수학 시험을 보러 오란다. 전화를 받고 왠지 모르게 기분이 너무 좋아졌다. 원래 학교도 재미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며 애들이 하나둘씩 학교를 옮겼고 입학시험을 보러 갔을 때 학교시설이나 학교음식이 비교가 되지 않게 마음에 들었기 때문일까.
- To be continued -